정조의 술 이야기
만인에게 왕이 건네는 한 잔의 술
영조 집권 시대까지는 조선왕조 500년간의 강력한 금주령이 있었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집행했던 최초의 사건도 바로 영조 때의 일이다. 하지만 금지는 욕망을 낳는 법. 시대가 변하는 속도에 맞추어 술 문화는 점차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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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에게 왕이 건네는 한 잔의 술
영조 집권 시대까지는 조선왕조 500년간의 강력한 금주령이 있었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집행했던 최초의 사건도 바로 영조 때의 일이다.
하지만 금지는 욕망을 낳는 법. 시대가 변하는 속도에 맞추어 술 문화는 점차 자유로워졌다.
숨어서 술을 유통하던 서민들에게는 거리에 나와 장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관리들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는 문화가 유행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람은 바로 영조 다음의 왕 ‘정조'였다.
당연하게도 정조에게는 술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다.
이미 한양 거리에 술집이 즐비해 있고
요즘처럼 백성들이 3차, 4차의 술자리를 이어가는 게 유행인 무렵의 일이다.
1796년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궁궐 담장에 누워 잠든 유생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정조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벌을 받게 될 운명이었던 그 유생에게 정조는 ‘술의 멋을 아는 이다.’라고 말하며
되레 쌀을 포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또한 규장각의 서리인 박윤목이 정조에게 불시에 불려와서는
인왕산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사실대로 말하니
이때에도 정조는 술을 줘서 돌려보내며 주흥을 마저 즐기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약용의
기록에도 정조와의 술자리 이야기가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중희당에서 삼중소주를 옥필통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면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마음속에 혼자 생각했었는데 몹시 취하지는 않았었다.”
정약용<정다산전서>
유생과 서기,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술을 권하던 왕, 정조.
그에게 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으레 붙여지는 설명은 어딘가 허술하고,
실수를 거듭한다는 내용이지만 정조에게는 그런 수식조차 붙지 않는다.
그에게 술은 흐트러짐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는 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술 문화 중에는 하나의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수작’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조는 관료들에게 술을 넉넉히 베풀고 취할 때까지 잔을 돌려가며 마시게 했다.
하나의 잔은 다양한 계층,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이어주는 상징으로,
바로 임금과 그의 국가관이었던 것이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 창덕궁 후원에 있는 존덕정 천장에는 정조의 친필로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
‘냇물은 만개지만 비추는 달은 하나이고, 임금은 만백성의 주인이다.’
백성을 공평하게 아끼려는 마음과 조선을 강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한 잔 술잔에 담겨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권해졌던 것.
정조에게 술은 한 잔의 깊은 마음이었다.
글 – 전진우 작가
그림 – 김지애 작가
쏘지 않은 한 발의 화살
정치와 학문에 능했던 정조.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어진(왕의 초상화)은 1989년 이길범 화백의 그림이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의 그림들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문헌의 기록을 통해 200년이 지난 뒤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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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학문에 능했던 정조.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어진(왕의 초상화)은 1989년 이길범 화백의 그림이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의 그림들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문헌의 기록을 통해 200년이 지난 뒤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서 정조는 단정한 비단옷을 입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학자군주'다운 모습.
그런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제는 소실된 3점의 어진 속에서 정조는 늘 군복을 입은 상태였다고 쓰여 있다.
'무인군주'로서 강인함을 강조하려 했다는 문장과 함께 말이다.
과연 정조는 또 어떤 매력을 지닌 왕이었을까?
조선의 수많은 왕들의 기록의 기록을 보면, 활쏘기 성적이 적혀 있는 기록들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태조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늘 활쏘기를 즐겼고 또 궁궐 안팎으로 궁술대회가 자주 열릴 수 있게 장려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에 관한 기록에는 그가 누구보다 활쏘기 훈련을 자주했고 또 실력도 뛰어났다는 내용이 많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미면서 활을 쏠 줄 모르는 것은 문무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그는 말했다.
학문을 습득하는 것만큼이나 무예를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자신이 직접 선별하고 훈련에 참여해 만든 특수부대 '장용영' 뿐 아니라, 국가의 행정과 문장을 담당하는 규장각 관리들에게까지 활쏘기를 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활이 망가지고 깍지는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은 부르트고 솜씨가 서툴러서 크게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여유당전서에 쓰여진 정약용의 기록이다.
'어사고풍첩'은 정조의 활쏘기 성적을 기록해 놓은 책인데, 1792년 한 해 동안의 기록이 특히 놀랍다고 알려져 있다.
한번에 50발을 쏴서 49발을 맞춘 날이 연속해서 열흘이나 되고 100발을 쏴서 98발을 맞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50발을 매일 같이 맞추던 시절이 이어졌는데, 성적이 계속 좋게 나오자 정조는 과녁을 축소하여 더욱 정밀한 활쏘기를 시도했다. 점점 작아지던 과녁은 말미에는 작은 부채나 곤봉, 편곤 등으로 대체 되었는데, 부채의 경우엔 5발중 4발을 곤봉은 10발 중 10발 모두를 적중 시켰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50이나 100이라는 만발의 숫자보다 정조에게는 한발 모자란 49발이라는 숫자가 따라 붙는다.
그건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신하들 앞에서 활쏘기를 즐겼던 그는 49발의 명중보다 한 발의 쏘지 않은 화살로 이야기 하는 왕이었다.
"임금은 신하에게 겸양의 미덕을 보여줘야 하는 게 '예'다." 정조에게 활은 누군가를 쏘아 죽이는 무기일 뿐 아니라 복잡한 시대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멀리 날아가 정확히 꽂히는 뾰족한 열쇠였다.
글 – 전진우 작가
그림 – 김지애 작가
비밀편지와 진심
1799년 3월, 신하들과 정조의 정치적 의견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그중 벽파(야당)를 대표하는 정치가 심환지는 정조 앞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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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편지와 진심
1799년 3월, 신하들과 정조의 정치적 의견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그중 벽파(야당)를 대표하는 정치가 심환지는 정조 앞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는다.
“신은 전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모습에 신하들은 놀라고 왕은 크게 노여워했다.
그런데 훗날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이는 정조와 심환지가 함께 꾸민 일로, 모두 국가 정치를 위한 부분적인 단합이었다.
위 사건의 하루 전날, 정조가 심환지에게 쓴 편지가 있다.
그 편지에는 심환지가 했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은 물론, 그 일을 지켜보는 이들의 반응과 이 행위에 대한 보답 내용까지도 적혀 있었다.
각본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난 심환지는 얼마 후 왕의 조용한 명령에 따라 아무런 손해 없이 다시 조정에 복귀한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심환지는 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왕의 부탁을 들어준 것일까?
정조가 비밀편지를 보낸 사람은 심환지뿐이 아니었다.
시파(여당)의 충신이었던 채제공의 서랍에서도 왕에게서 받은 수많은 편지가 발견된다.
정조는 당을 대표하는 신하들과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을 나무라고 압박하는 것은 물론, 어떤 일은 칭찬하고 또 걱정해 주며 아주 다양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건강이 좋지 않던 심환지의 가족 상황을 듣고, 그의 아내에게 필요한 약과 음식을 세심하게 챙겨주며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2009년 학자들에 의해 이 편지들 대부분이 공개되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알던 정조와는 다른,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문인들이나 관리들도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이 정조의 친필로 남아 있던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지금의 인터넷 용어 같은 것으로 'ㅋㅋ'나 'ㅎㅎ' 정도의 문장들이다.
정조실록에서 자주 쓰이는 '불인문직여'라는 표현도 '차마 들을 수 없는 왕의 말들'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어쩌면 정조가 꽤나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편지를 통해 두 정당의 신하들과 믿음을 쌓아간 정조는 훗날 심환지에게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된다.
바로 사도세자를 섬기다가 따라 죽었던 수행비서 '임위'의 충절을 모든 신하들 앞에서 기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는 벽파의 정치 의견과 정반대되는 내용이었지만, 심환지는 정조의 편지에 따라 임위를 충신이라고 인정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벽파와 시파 양쪽에게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정조 정치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양쪽을 현명한 방법으로 한데 모으는 기술에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심환지에게 큰 상으로 보답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비밀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다.
"나는 경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고, 경도 나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병을 앓고 있던 정조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수단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을지 몰라도, 마지막 편지에는 마음을 나눈 벗에게 신뢰를 느끼는 문장들이 있다.
심환지는 정조 암살론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금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어떤 진실은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 나라의 왕이 자신과 뜻이 다른 신하와 나누었던 아흔아홉 통의 비밀편지는 불에 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뿐이다.
글 – 전진우 작가
그림 – 김지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