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 이야기
1799년 3월, 신하들과 정조의 정치적 의견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그중 벽파(야당)를 대표하는 정치가 심환지는 정조 앞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는다.
“신은 전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모습에 신하들은 놀라고 왕은 크게 노여워했다.
그런데 훗날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이는 정조와 심환지가 함께 꾸민 일로, 모두 국가 정치를 위한 부분적인 단합이었다.
위 사건의 하루 전날, 정조가 심환지에게 쓴 편지가 있다.
그 편지에는 심환지가 했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은 물론, 그 일을 지켜보는 이들의 반응과 이 행위에 대한 보답 내용까지도 적혀 있었다.
각본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난 심환지는 얼마 후 왕의 조용한 명령에 따라 아무런 손해 없이 다시 조정에 복귀한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심환지는 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왕의 부탁을 들어준 것일까?
정조가 비밀편지를 보낸 사람은 심환지뿐이 아니었다.
시파(여당)의 충신이었던 채제공의 서랍에서도 왕에게서 받은 수많은 편지가 발견된다.
정조는 당을 대표하는 신하들과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을 나무라고 압박하는 것은 물론, 어떤 일은 칭찬하고 또 걱정해 주며 아주 다양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건강이 좋지 않던 심환지의 가족 상황을 듣고, 그의 아내에게 필요한 약과 음식을 세심하게 챙겨주며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2009년 학자들에 의해 이 편지들 대부분이 공개되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알던 정조와는 다른,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문인들이나 관리들도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이 정조의 친필로 남아 있던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지금의 인터넷 용어 같은 것으로 'ㅋㅋ'나 'ㅎㅎ' 정도의 문장들이다.
정조실록에서 자주 쓰이는 '불인문직여'라는 표현도 '차마 들을 수 없는 왕의 말들'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어쩌면 정조가 꽤나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편지를 통해 두 정당의 신하들과 믿음을 쌓아간 정조는 훗날 심환지에게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된다.
바로 사도세자를 섬기다가 따라 죽었던 수행비서 '임위'의 충절을 모든 신하들 앞에서 기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는 벽파의 정치 의견과 정반대되는 내용이었지만, 심환지는 정조의 편지에 따라 임위를 충신이라고 인정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벽파와 시파 양쪽에게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정조 정치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양쪽을 현명한 방법으로 한데 모으는 기술에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심환지에게 큰 상으로 보답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비밀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다.
"나는 경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고, 경도 나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병을 앓고 있던 정조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수단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을지 몰라도, 마지막 편지에는 마음을 나눈 벗에게 신뢰를 느끼는 문장들이 있다.
심환지는 정조 암살론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금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어떤 진실은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 나라의 왕이 자신과 뜻이 다른 신하와 나누었던 아흔아홉 통의 비밀편지는 불에 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