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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이란?

천장은 풍수지리를 믿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집안 또는 왕실에서 무덤을 쓴 이후 수년 혹은 십 수 년에 걸쳐 그 집안 또는 왕실에 우환이 생기면 그 원인을 무덤을 잘못 쓴 탓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환이 생기지 않을 만한 장소를 다시 골라서 새로이 무덤을 옮겨 조성하게 되는데, 이때 풍수지리 이론과 들어맞는 곳을 선정한다.

음택 풍수지리 이론에 비추어 보면, 한 집안의 미래는 음택의 장소와 환경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천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제사를 지낼 후사가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는 제사를 숭봉한 유교 사회이면서 풍수지리가 중요 문화 콘텐츠로 기능했던 사회이니만큼 왕실이나 집안의 전도를 걱정해서 천장을 실행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이장기록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를 천장한 『태조실록』의 일이다. 이후 태종대에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분묘를 천장하였고, 덕릉(德陵), 안릉(安陵)을 천장하기 위해 조회를 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릉(寧陵)으로의 천장, 즉 예종 때 세종의 능묘를 헌릉(獻陵)의 서쪽에서 경기도의 영릉으로 천장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천장사례이다.
세종대왕의 원래 능묘는 당시의 대소 관료와 학자들의 현장 답사 및 다양한 풍수지리서의 내용에 비추어서 조성되었지만, 능을 조성한 지 19년 동안 불미스러운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세종을 이어 등극한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종기로 죽고, 단종은 재위 3년만에 사약을 받았으며, 세조는 재위 13년 만에 지병으로 죽게 되자 예종 때 세종대왕의 능묘를 이장하려는 논의가 일어나게 된다. 1469년(예종 1)에 세종을 여주로 옮겨 모시려고 광중을 파니, 19년이 지났으나 시신은 물론 삼베 옷 하나 썩지 않았다고 한다. 몇 차례의 천장 논의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영릉의 형세에 대한 토론도 있었지만 결국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영우원(永祐園)에서 화성시의 융릉(隆陵)_당시, 현륭원으로 천장한 것도 대표적인 천장 사례이다. 정조는 풍수지리를 직접 연구한 대표적인 왕인데, 융릉의 형세를 직접 살펴본 것은 물론, 은신군(恩信君)의 묘로 소점한 곳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새로이 천장할 것을 명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천장은 왕실은 물론, 사대부가를 비롯하여 일반 평민들까지도 자주 실행했던 부분이다. 천장은 이장(移葬)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왕의 경우에는 천봉(遷奉)이라고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전란의 와중에서 왕의 시신을 제대로 의례를 갖추어 묻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또 옮겨 묻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때 잦은 개장과 파묘가 있었다는 것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드러나 있고, 그 이면에는 조상의 무덤을 훼손 하는 것이 후손에게 재앙을 초래한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사도세자 천장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사도세자 천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있다.

정조 13년 10월 5일 정사 1789년
영여(상여)가 구원(배봉산의 영우원)으로부터 출발하다.
영여(靈轝)가 둑도(纛島)에서 출발하여 과천에 머물렀다. 석곡(夕哭)·석전(夕奠) 및 석상식(夕上食) 때가 되자 모두 의식에 따라 예를 거행하였다.

정조 13년 10월 6일 무오 1789년
영여가 과천으로부터 출발하여 수원(水原)의 신읍(新邑)에 있는 막차(幕次)에 이르러 주정전(晝停奠)을 지낸 다음, 다시 출발하여 원소의 정자각에 도착하였다. 재궁(梓宮)을 받들어 찬궁 안의 탑(榻) 위에 안치하였는데 진설(陳設)은 처음과 똑같게 하였으며 설전(設奠)은 정해진 의식대로 하였다. 석상식(夕上食)·포곡(哺哭)·석전(夕奠)을 겸하여 지냈다.

정조대왕의 대가(大駕)가 과천현(果川縣)에서 주정(晝停)하고 사근현(沙斤峴)을 넘어 경진년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주정을 하였던 옛 터를 찾았다. 주민들 가운데 그때에 행차를 구경했던 사람들에게는 쌀을 지급하도록 경기 관찰사에게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경모궁(景慕宮)의 행차가 이곳을 지날 때 예교(睿敎)하시기를 ‘대가(大駕)의 주정소(晝停所)가 저쪽 언덕에 있으니, 어떻게 나의 주정소를 다시 설치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는, 이곳에다 옮겨 설치하도록 하셨다. 이 일은 내가 직접 들은 것인데 이제 이곳에 왔으니 나의 심회를 억제하기 어렵구나. 이후로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대충 수리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저녁에 수원부(水原府)에 머물렀다.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1789년
정조대왕의 행차가 새 원소에 나아갔다. 재실에 들어가 시복(緦服)을 갖춰 입고 정자각까지 걸어가서 재궁을 살펴본 다음, 곡하는 자리에 가서 곡을 하였다. 이어 아침 상식을 절차대로 올리고 수도각(隧道閣)에 나아가 광(壙) 안의 흙 빛깔과 사방 산의 국세(局勢)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총호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으나 유독 수도각 안에만은 한 점의 안개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아침과 썰렁한 밤의 바람 기운이 매섭고 싸늘한 시각에도, 이 각에 들어서면 따뜻하기가 온돌방과 같으니, 상서로운 광채가 모여들고 길한 기운이 스며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걸어서 주산(主山)의 봉우리에 올랐다가 보여(步轝)를 타고 산등성이를 빙 돌아나와 후탁(後托)의 머리를 들이민 지점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 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만큼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자각으로 돌아와서 주다례(晝茶禮)를 친히 거행하였다.

재궁에다 '상(上)'자를 썼다. 【서사관(書寫官)은 박명원(朴明源)이었다.】